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 (문단 편집) === 칠레 혁명 === [[파일:external/image.pressian.com/40060426104533.jpg]] [[칠레]]의 [[구리(원소)|구리]] 광산. 미국의 광물 독점으로 칠레는 오랜 기간 동안 구리 국유화에 실패했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살바도르 아옌데)] > 칠레혁명의 과정에서 보여준 이른바 '''칠레의 길'''은 ''''총이 아닌 투표에 의해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실현한, 그러나 곧 투표 아닌 총에 의해 그것이 좌절된''' 아주 희귀한 선례였다. 그러나 선거를 통하여 또 의회제도를 통하여 시도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이행의 실험'''이 성립된 지 3년만에 미국을 등에 업은 군부의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1973년 9월 11일 칠레 산티아고의 모네타궁이 군사쿠데타에 의해 공습을 받음으로써 '''칠레 3년간의 실험'''은 막을 내렸다. '''칠레의 실험'''이 좌절된 후에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사회주의 이행을 둘러싼 많은 논쟁들이 제기되었다. >---- > 명불상 지음, 박현채·김홍명 엮음옮김, 『통일전선과 민주혁명 2 』, 사계절, 1988, p.329 1970년, [[칠레]]는 격변했다. 민중연합이란 선거 연합의 후보인 사회당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턱걸이로 당선되어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민중의 열망이 만들어 낸 승리라 하면 기분 좋겠지만 아옌데의 득표율은 사실 옛날보다 더 떨어진 상태였다. 중도파와 우파가 지난 대선처럼 힘을 합치지 않아 표가 갈려 얻은 승리란 게 더 정확하다.[* 선거 개표 초기 우익들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익들은 김칫국부터 마셨다가, 패배하여 실망하기에 이르렀다.] 취약점은 금새 노출됐다. 민중연합이란 선거연합은 대통령을 배출해 냈지만 의회에선 다수세력이 아니었다. 1964년 칠레에는 부르주아 개혁파인 프레이 정권이 들어서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프레이 정권은 사회/경제적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그의 개혁은 실패했고, 치솟는 인플레와 파업 등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나빠졌다. 1968년, 칠레 노동조합연맹은 프레이의 파업금지령에 맞서 전국적인 파업을 단행하는 등 직접행동에 나섰다.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은 투쟁을 더욱 확산시켰다. 1969년에는 파업 1,939건에 참가자 23만 725명, 1970년에는 파업 5,295건에 참가자 31만 6,280명으로 늘어났다. 그런 것관 별개로 상당 부분 운이 좋아 집권한 아옌데 정권의 정책은 자신을 지지해준 여러 세력들(노동자/중간계급/자본가 일부)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혁을 합법적인 방법으로만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1971년 7월의 국유화조치(구리, [[철(원소)|철]], 질산염, 섬유산업 및 은행 등), 대대적인 사회개혁(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66% 인상, 400만 어린이에 대한 우유 무료급식, 실업자구제 등), 그리고 칠레 농민의 절대적 염원이었던 토지개혁(3,300건의 대규모 토지몰수) 등 일련의 공세가 정부에 대한 대중적 지지의 증가와 대규모 동원에도 불구하고, 지도부는 양대 보수정당인 기민당과 국민당의 합의와 합헌주의에 기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반동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1973년 3월 총선에서 민중연합이 44%의 득표로 다수의 위치를 점하게 된 상황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 군부 세력의 무력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피격당했고, 미국은 곧바로 피노체트 정권을 지지했다.[* [[살바도르 아옌데]] 문서에 상술된 내용이지만, 아옌데의 죽음은 과거 전투 도중 피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자결로 확인됐다.]오늘날 이 쿠데타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여러가지 증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옌데의 사회주의적인 노선에 미국이 제재를 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애기들이 먹는 분유까지 제재했다. 그 이유는 아옌데 정부를 가난하게 만들어 혼란을 야기한 뒤, 색깔혁명을 하기 위해서.] 구리 국유화는 무효화되지 않았으나[* 아이러니한 사실은 피노체트하에서 다른것은 민영화가 착착 진행된 반면에 구리국유화만큼은 변하지 않아서 이후로 칠레 정부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토지개혁은 거의 다 무효로 돌아갔다. 피노체트는 칠레 사회에서 ‘마르스크주의’를 박멸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교육계에서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줄줄히 축출됐다. 그리고 그 자리는 군부가 파견한 장교가 메웠다. 반군부 진영을 단합시킬 만한 인물들도 죄다 암살당했다.[* 대표적으로 파블로 네루다나 빅토르 하라 등을 들 수 있다.] 노동조합 활동이 극도로 위축됐다. 또한 아옌데가 국유화한 구리산업을 민영화했고, 여타 광업 부문을 외국계 업체에 개방했으며, 칠레의 여러 지하자원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됐다. 수입 관세는 낮아졌고, 이로 인해 수입 상품이 물밀 듯이 밀려오면서 칠레의 공장 대부분이 문을 닫게 됐다. 이로 인해 실업과 빈곤율이 급등했고, 임금도 급락했다. 칠레 좌파들이 수십 년에 걸쳐 이뤄낸 사회적 성과가 고스란히 무너져 내렸다. 칠레 노동자의 평균임금이 인민 연합 집권기인 1970년 수준을 회복한 것은 지난 2000년이 되어서였을 정도다. 피노체트는 최소 반대파 3,200명을 즉결 처형했고, 수만 명을 구금하고 고문했다. 피노체트 정권의 공포정치는 '''죽음의 카라반(Caravan of Death)'''으로 알려진 칠레군 살인부대의 작전으로 시작됐으며, 닉슨 정부 당시 국무장관이던 핸리 키신저는 미국이 피노체트 살인 정권을 신속히 인정하고 원조를 제공하도록 조치했다. 당시 키신저가 피노체트 앞에서 한 말은 '''우리는 각하가 여기서 하시려는 일에 공감합니다.'''였다.[*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86] 피노체트 정부의 살인행위는 칠레 외부에서 도 일어났다. 키신저 국무장관의 칠레 방문 3개월 후 피노체트가 보낸 암살자들이 워싱턴에서 아옌데 정부 때 미국 주재 칠레 대사를 지낸 오를란도 레텔리에 정책연구소 연구원과 레텔리에를 돕고 있던 미국인 로니 모피트를 살해했다. 이들이 탄 자동차는 '''백악관에서 14 블록 떨어진 지점에서 폭발했다'''고. 뿐만 아니라 칠레의 피노체트 정부는 미국 CIA가 벌이는 암살작전인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이를 통해 반대팔 암살작전을 폈다.[*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p.87] 결국 피노체트 정부는 이러한 폭압통치를 이어갔으며, 1990년 민주화로 물러날 때까지 17년간 칠레에서 군부독재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